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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제사건

석주명 박사의 삶과 비극적 죽음: 한국 나비학의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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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명 박사의 삶과 비극적 죽음: 한국 나비학의 선구자]

석주명 박사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나비 연구자이자 박물학자, 언어학자, 역사학자로, 한국 생물분류와 제주어 연구를 이끈 선구자입니다. 그는 생애를 나비 연구에 헌신하며 국내 나비의 분류와 명칭을 체계화한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비극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1. 석주명의 생애와 업적

  • 출생과 성장
    1908년 평양에서 태어난 석주명은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나 송도고등보통학교와 일본 가고시마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하며 학문적 기반을 닦았습니다. 그는 독립운동에 영향을 받은 가정환경과 곤충학에 대한 관심으로 한국 나비 연구의 길을 걷게 됩니다.
  • 나비 연구
    그는 일본 학자들이 잘못 분류한 나비를 독자적으로 재분류해 248종으로 체계화했으며, 국내 나비의 학명을 대부분 직접 명명했습니다. 배추흰나비를 16만 마리나 사육하며 개체변이를 연구했고, 지리산팔랑나비 발견 등으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학자가 되었습니다.
  • 제주도 연구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제주도에서 연구소장으로 재직하며 나비뿐 아니라 제주도의 방언과 자연환경을 연구해, 제주학 연구의 기초를 세웠습니다.

2. 석주명의 비극적 죽음

석주명 박사는 6.25 전쟁 중인 1950년 10월 6일, 국립과학관의 재건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비극을 맞이했습니다.

  • 사건의 전말
    길을 서두르던 석주명이 술 취한 국군 병사들과 부딪혔고, 이들은 그를 공산당원으로 오인해 체포했습니다. 석주명은 "나는 공산당이 아니며 나비 학자"라고 해명했지만, 병사들은 평안도 사투리를 근거로 북한군 장교라고 단정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총에 맞아 사망했고, 시신은 가마니에 싸여 강물에 던져졌습니다.
  • 충격과 외신 보도
    이 사건은 당시 외신에도 보도될 만큼 충격적이었으며, 석주명을 살해한 병사들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일부에서는 반공 성향의 서북청년단 출신 병사들에 의한 살해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3. 왜곡된 역사와 재조명

석주명의 비극적인 죽음은 오랫동안 사실과 다르게 알려졌습니다. 일부 어린이 위인전이나 교과서에서는 그의 죽음을 북한군의 살해로 서술하거나, 단순한 전쟁 사고로 왜곡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그의 죽음의 진실이 밝혀지면서 석주명의 헌신적인 연구와 비극적 삶은 다시 조명받고 있습니다.


4. 석주명의 유산

  • 학문적 업적
    석주명은 한국 나비 연구의 기틀을 세운 학자일 뿐만 아니라, 제주학과 한국 생물학 연구의 선구자로서 그 공로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 기념 사업
    그의 연구소였던 제주도의 옛 생약연구소는 2020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석주명의 업적을 기념하는 다양한 사업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결론]
석주명 박사는 한국 학문의 발전을 위해 헌신했지만, 전쟁의 혼란 속에서 억울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의 업적은 여전히 한국 생물학과 곤충학의 기반이 되고 있으며, 우리는 그의 헌신과 비극적 죽음을 기억하며 역사적 교훈을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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